5월의 묘리는 온통 습기로 가득했다. 피부에 닿는 공기는 눅눅했고, 바람 끝에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짙은 흙내음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竹美山閣 藝術園區의 전시관을 아주 천천히,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걸었다. 유럽식 소파가 놓인 휴식 공간에서는 오래된 서양 노래가 낮고 느리게 흘러나와 공간의 밀도를 더했다. 우리는 어느 작품 앞에 멈춰 섰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어떤 기법이 훌륭한지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나란히 서 있을 뿐이었다. 가끔 어깨가 스칠 때마다 묘한 긴장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교차했다. '이 정도의 거리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관의 은은한 조명 아래서 우리는 서로의 옆얼굴을 가끔 훔쳐보았고, 대화는 적었지만 그 침묵은 결코 어색하지 않았다. 발소리가 두툼한 카펫에 흡수되어 고요해질수록, 우리는 그 공간의 일부가 되어 서로에게 더 깊이 고요히 머무했다.
안개 너머로 스며든 고요의 온도
태안에서 가장 고도가 높다는 다실로 향했다. 통창 너머로 펼쳐진 묘리의 산세는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겹겹이 쌓인 산허리를 하얀 안개가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고, 그 풍경은 마치 세상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거대한 커튼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따뜻한 차를 주문했다. 찻잔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김이 안경에 하얗게 서렸고, 우리는 동시에 안경을 닦아내며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뜨거운 물속에서 찻잎이 천천히 기지개를 켜며 펴지는 모양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소란이 고요해졌다. 5월의 산공기는 서늘했지만,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찻잔의 온기는 적당히 다정했다. 혀끝에 남는 차의 쌉싸름한 맛이 정신을 맑게 깨웠다. 창밖의 안개가 조금씩 걷히며 짙은 초록색 숲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았다. 아무런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무용한 시간, 그것이 우리가 이번 여행에서 간절히 원했던 전부였다.
대리석의 온기와 밤의 리듬
밤이 깊어지자 우리는 竹美山閣 藝術園區 객실 안에 마련된 대리석 욕조에 몸을 담갔다. 묵직한 질감이 느껴지는 차가운 대리석이 따뜻한 물로 채워지자, 낮 동안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의 끈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물결이 찰랑일 때마다 욕실을 가득 채운 레몬 버베나 향이 코끝을 스쳤다. 상큼하면서도 차분한 그 향기는 우리의 마음을 한층 더 말랑하게 만들었다. 물속에서 우리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낮에는 차마 꺼내지 못했던 사소한 고백들과 숨겨두었던 진심들이 따뜻한 물결을 타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이후에는 원주민들의 춤 공연을 관람했다. 강렬한 북소리와 함께 펼쳐지는 역동적인 춤사위는 정적이었던 우리의 분위기에 뜨거운 생기를 불어넣었다. 공연자들의 유쾌한 농담에 함께 웃음을 터뜨리며,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그 리듬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서툴고 어설픈 몸짓이었지만, 함께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충만한 밤이었다.
별빛이 내려앉은 침묵의 무게
공연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 우리는 옥상 전망대로 올라갔다. 5월의 밤하늘은 믿기지 않을 만큼 맑았고, 도시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별들이 쏟아질 듯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빛 공해가 없는 산 정상이라 별의 경계가 칼날처럼 뚜렷했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거대한 우주의 바다를 올려다보았다. 밤공기는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맞잡은 손바닥만큼은 데일 듯 뜨거웠다. 누군가 별자리의 이름을 속삭였지만, 그것이 무슨 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저 수많은 별 중 하나가 지금 우리를 비추고 있다는 느낌이면 족했다. 산 아래에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완벽한 배경음악이 되어주었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의 고른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상대의 존재감은 더욱 명확하게 다가왔다. 화려한 수식어는 필요 없었다. 그냥 여기, 함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주는 안도감이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다시 돌아가면 또다시 치열한 일상이 시작되겠지만, 이 밤의 온도는 영원히 기억될 것 같았다.
레몬 버베나 향이 밴 시트 위에 누워, 우리는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묘리 시내의 '강기구기'에서 쫄깃한 훈툰과 육원을 꼭 맛보길 권한다.
- 날씨가 맑은 날 밤, 옥상 전망대에서 아무 말 없이 별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