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화역에 내리자마자 망막을 찌르는 하얀 빛이 쏟아졌다. 공기는 눅눅한 젖은 수건처럼 무겁게 피부에 쩍쩍 달라붙었고, 숨을 쉴 때마다 비릿한 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누가 먼저 길을 잃을지 내기를 했지만, 결국 우리는 길을 잃기도 전에 끈적한 더위에 먼저 항복하고 말았다. 걷는 것보다 숨을 고르는 게 더 큰 과업처럼 느껴지는 오후였다.
빨대로 빨아올린 파파야 우유는 묵직한 과육의 질감이 혀끝을 부드럽게 감쌌다. 뇌까지 찌릿하게 만드는 차가운 단맛이 온몸의 열기를 순식간에 앗아갔다. 이어서 맛본 불이방의 에그타르트는 갓 구워진 껍질의 고소한 풍미가 코끝을 간지럽혔고, 입안에서 뭉개지는 따스한 온도가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진청 호스텔 로비에 들어서자 노출 콘크리트의 서늘함과 붉은 벽돌의 투박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친구가 미간을 찌푸리며 "야, 여기 공사 덜 끝난 거 아니야?"라고 툭 던졌다. 나는 대답 대신 벽면의 거친 질감을 손끝으로 훑었다. 과한 친절보다 이런 무심한 세련됨이, 적당히 낡고 단단한 이 공간이 주는 위로가 더 컸다.
발코니 한구석, 붉게 녹슨 철제 보일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저 낡은 쇳덩어리를 '타임머신'이라 부르기로 했다. 7월의 습한 바람이 녹슨 틈새를 지나며 낮은 휘파람 소리를 냈고, 우리는 그 옆에 기대어 다음 끼니에 무엇을 먹을지만을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것이 이번 여행의 유일하고도 가장 중대한 의제였다.
빳빳한 시트의 감촉을 느끼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 천장이 높아 시야가 트여 있었고, 창밖으로는 멀리서 기차의 낮은 경적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온몸의 근육을 느슨하게 풀었다. 60퍼센트의 힘만 쓰기로 한 약속을 지키며, 천장의 미세한 무늬를 세다 보니 어느덧 깊은 정적이 찾아왔다.
빛을 머금은 유리 벽돌 벽이 인상적이었다. 외부의 날카로운 햇살이 투명한 벽을 통과하며 뭉툭하고 부드러운 우윳빛으로 변해 공간을 채웠다. 나선형 계단을 오를 때 발바닥에 닿는 금속의 차갑고 단단한 감촉이 정신을 맑게 깨웠다. 붉은 벽돌과 유리, 그리고 철제가 빚어내는 무채색의 조화는 마음속의 소음까지 정돈해 주는 기분이었다.
오후의 정적을 깨고 예고 없는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산도 없이 거리로 나섰던 우리는 금세 옷이 젖어 몸에 찰싹 감겼다. 서로의 엉망이 된 몰골을 바라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젖은 채로 돌아온 로비에서 맞이한 에어컨 바람은 그 어떤 향수보다 달콤했고, 옷에서 나는 눅눅한 흙내음조차 여행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가이드북은 가방 구석에서 눅눅하게 구겨진 채 잊혀 있었다. 단 한 페이지도 제대로 읽지 않았지만, 그냥 걷고, 먹고, 눕는 단순한 반복 속에 진짜 여행이 있었다. 특별한 깨달음이나 거창한 성취는 없었지만, 함께 누워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을 친구들이 곁에 있었다. 그 무용한 시간들이야말로 이번 여행이 내게 준 가장 밀도 높은 선물이었다.
젖은 신발 끝에서 투명한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 역 바로 앞이라 짐 풀기 정말 편해. 고민 말고 여기 묵어.
- 파파야 우유는 무조건 큰 사이즈로 마셔봐. 넉넉해야 제맛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