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눅한 공기 속을 유영하던 낮의 우리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그저 타이중역에 내렸을 뿐인데, 피부에 닿는 공기는 눅눅한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4월의 타이중은 24도라는 적당한 온도를 가졌지만, 습도는 마치 투명하고 얇은 막을 온몸에 씌운 것처럼 끈적였다. 국립 타이중 가극원으로 향하는 길, 우리는 직선 하나 없이 유려하게 흐르는 건물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58개의 곡벽이 서로 엉켜 있는 그 기묘한 건축물을 보며, 나는 문득 우리의 관계가 이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그 모호한 흐름이 결코 나쁘지 않은 그런 상태.
초오도를 따라 걷다 보니 이름 모를 하얀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비처럼 쏟아졌다. 통화꽃이라고 했다. 당신의 왼쪽 어깨 위에 작은 꽃잎 하나가 가만히 내려앉았다. 손을 뻗어 떼어내 줄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냥 두기로 했다. 그 작은 흰색 점이 당신의 옷감 위에서 조용히 숨 쉬는 모습이 퍽 다정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의 보폭을 맞추려 애쓰지 않았다. 누군가 조금 앞서 걷고, 누군가 조금 뒤처지더라도 그 거리감조차 여행의 일부였다. 길가에 핀 이름 없는 풀꽃들의 향기를 맡고, 가끔은 멈춰 서서 낯선 이들의 표정을 읽었다. 특별한 대화는 없었지만, 거리의 적당한 소음들이 우리의 빈틈을 포근하게 채워주었다.
정오의 로비가 건넨 낯선 안도감
Ohotel Li Jia Yuan Di Jiu Dian의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우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 1987년부터 그 자리를 지켜왔다는 바록 양식의 로비는 지나칠 정도로 화려했다. 높은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을 머금은 수정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반짝였고, 공간 전체를 감싸는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웅장한 공간감 속에 서 있으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작아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작아짐이 오히려 편안하게 다가왔다. 내가 짊어진 책임이나 사회적인 이름 같은 무거운 것들이, 이 거대한 공간의 부피에 밀려 잠시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로비 한가운데서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려한 배경 속에 놓인 우리는 꽤 초라해 보였지만, 그래서 더 서로에게 밀착된 느낌이었다. "여기 좀 이상할 정도로 크네"라고 당신이 낮게 속삭였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웅장함이라는 것은 때로 사람을 압도하지만, 이곳의 화려함은 오래된 책장 속에 끼워둔 말린 꽃잎처럼 어딘가 다정하고 아늑했다. 쾌적한 에어컨 바람이 피부의 끈적임을 씻어내던 그 찰나, 우리는 비로소 이 여행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했다. 무용한 화려함이 주는 위로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정오였다.
밤의 우리가 나눈 칫솔 없는 대화
방으로 들어서자 40제곱미터의 넉넉한 공간이 우리를 맞이했다. 디럭스 더블룸의 넓이는 생각보다 여유로웠고, 6x7피트의 거대한 침대는 마치 방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 같았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섬의 정중앙에 나란히 누웠다. 천장의 정교한 무늬를 하나하나 세다 문득 깨달았다. 호텔에 일회용 칫솔과 치약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환경 보호를 위한 정책이라는 안내문을 읽었지만, 막상 칫솔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우리, 아무것도 안 챙겨왔네"라고 말하는 당신의 목소리에 건조한 유머가 섞여 있었다. 우리는 편의점에 다녀올지, 아니면 그냥 이대로 잠들지 진지하게 토론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칫솔질을 하지 않은 입안의 텁텁함보다, 이 포근한 침대 속에서 나누는 무의미한 대화가 훨씬 가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주 어릴 적의 기억, 이제는 어디 있는지 모를 잃어버린 물건들, 그리고 우리가 서로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던 사소한 습관들에 대하여. 조명은 낮게 고요해져 있었고, 방 안에는 오직 우리의 규칙적인 숨소리와 가끔 들려오는 도시의 먼 소음만이 존재했다.
깊은 밤, 섬이 된 방의 온도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받아 몸을 깊숙이 담갔다. 물의 온도는 정확히 적당했고, 피부에 닿는 물의 감촉은 매끄러웠다. 욕실의 타일이 전해주는 은은한 온기가 몸의 긴장을 천천히 풀어주었다. 물속에서 눈을 감으면 내가 지금 타이중의 어느 호텔에 있는지, 아니면 아주 먼 곳에 와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그 기분 좋은 불확실함이 좋았다. 밖으로 나와 다시 침대에 누웠을 때, 면 시트의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운 촉감이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밤의 Ohotel Li Jia Yuan Di Jiu Dian은 낮의 화려함을 모두 지워낸 모습이었다. 이제 오직 우리 두 사람의 체온만이 방 안의 온도를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내일은 어디를 갈지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천장의 무늬를 다시 확인하고, 조금 더 늦게까지 누워 있는 것이 이번 여행의 유일한 목적이 되기를 바랐다. 완벽한 계획은 없었지만, 부족한 것들이 모여 오히려 빈틈없이 채워진 밤이었다. 칫솔이 없어도, 정해진 목적지가 없어도, 지금 이 온도가 우리에겐 충분했다.
창밖으로 희미하게 보이던 타이중의 야경이 옅은 안개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 4월의 통화꽃을 보러 가신다면 넉넉한 보폭으로 천천히 걷기를 권합니다.
- Ohotel Li Jia Yuan Di Jiu Dian에 머무신다면 개인 칫솔과 치약을 꼭 챙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