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금 어디쯤인 것 같니?"
"몰라. 하지만 이 길 끝에 파파야 우유 가게가 있을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들어."
민석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멈춰 서서 그를 빤히 보았다. 우리는 벌써 세 번째 같은 골목을 돌고 있었다. 낡은 벽돌담 사이로 스며드는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그 '느낌' 때문에 우리가 한 시간째 뱅뱅 돌고 있는 거야. 넌 탐험가와 길치 사이의 아주 좁은 경계선에 위태롭게 서 있구나."
지수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야, 원래 여행은 길을 잃어야 진짜 시작되는 거야. 이게 바로 낭만이라는 거지!"
"낭만 좋아하시네. 내 발가락이 이미 낭만적으로 꽁꽁 얼어붙고 있다고!"
우리는 서로를 깎아내리며 깔깔거렸다. 목적지가 어디였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건조한 겨울 공기 속에 섞인 우리의 웃음소리가 골목길을 가득 채웠고, 그 소란함만으로도 충분히 충만했다.
여백이 주는 뜻밖의 해방감
청셰 행려의 객실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예상 밖의 여유였다. 효율만을 쫓아 공간을 쥐어짜 내는 일반적인 비즈니스 호텔들과 달리, 이곳은 침대와 벽 사이에 넉넉한 숨구멍을 남겨두었다. 짐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놓아도 발 디딜 곳이 충분하다는 사실은, 낯선 도시에서 느끼는 작은 해방감이었다. 특히 여행자의 편의를 배려한 큼지막한 화장대 앞에 서자, 엉망이 된 매무새를 다듬으며 비로소 안도감이 밀려왔다.
12월의 창화는 햇살이 다정했지만 바람은 서늘했다. 창문을 살짝 열자 건조한 흙 내음과 이웃집에서 끓이는 구수한 차 향기가 섞여 들어왔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푹신하고 부드러운 매트리스 위로 몸을 던졌다. 하얀 시트 위로 오후의 낮은 햇살이 금빛 가루처럼 흩뿌려졌고, 몸을 감싸는 포근한 촉감에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역에서 호텔까지 걷는 동안 보았던 빛바랜 간판들과 낡은 콘크리트 벽의 풍경이 방 안의 정적과 대비되어 더욱 아늑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낮은 코골이 소리가 리듬처럼 들려오고, 천장의 무늬를 세는 정적이 흐르는 시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사라진 자리에는 쾌적한 나른함이 들어찼다. 누워있는 것 자체가 이번 여행의 가장 완벽한 목적지가 된 순간이었다.
어둠이 내린 뒤에야 들리는 진심
"야, 너는 내년에 뭐 하고 있을 것 같아?"
조명을 낮춘 방 안, 우리는 침대 가장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낮의 소란함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는 조금 더 정직한 무게의 목소리들이 남았다.
"글쎄. 아마 지금처럼 누워있지 않을까. 그냥 적당히 먹고, 적당히 자고."
"너는 참 일관적이라 좋다. 가끔은 그게 부러워."
지수가 낮게 중얼거렸다. 우리는 낮에 먹었던 육원의 끈적하고 달콤한 소스 맛을 떠올렸다. 팔괘산 대불 광장에서 보았던 달그림자 등불들의 희미한 빛, 그리고 뺨에 닿던 서늘한 공기.
"사실, 이번 여행에서 제일 좋았던 게 뭐야?"
"음. 아까 그 파파야 우유. 끝맛이 약간 쌉쌀했던 거. 그게 꼭 우리 지금 기분 같아서 좋았어."
우리는 다시 작게 웃었다. 거창한 깨달음이나 감동은 없었지만,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사람들, 그리고 나쁘지 않은 장소가 주는 위로가 있었다.
창밖으로 희미하게 일렁이는 등불 하나가 밤의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 60년 전통의 파파야 우유, 끝에 남는 쌉쌀한 단맛을 천천히 음미해 보세요.
- 12월 말 팔괘산 대불의 달그림자 등불 축제 속에서 서늘한 겨울 공기를 걸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