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화역에 내려 걷기 시작한 지 불과 2분. 짧은 거리였지만 2월의 건조한 바람이 뺨을 날카롭게 스쳤다. 우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 길의 끝에서 마주한 진청 호스텔의 문을 열자,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천장까지 아찔하게 뻗은 회전 계단이었다. 높은 곳에서부터 수직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나선형 계단의 그림자를 바닥에 겹겹이 쌓아 올리고 있었다. 마치 빛의 폭포가 거실 한복판에 내려앉은 듯한 광경이었다.
공간은 무채색의 금속판과 붉은 벽돌, 그리고 반투명한 유리 벽돌들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누군가는 이를 인더스트리얼 풍이라 부르겠지만, 내게는 오래된 시간과 새로운 감각이 적당히 타협하며 공존하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유리 벽돌을 통과하며 뭉툭하게 굴절된 빛 덕분에 로비의 공기는 생각보다 포근했다. 우리는 로비 한쪽에 마련된 작은 바에 나란히 앉았다. 손끝에 닿는 나무 테이블의 거친 결이 느껴지자, 바깥바람에 얼어붙었던 손가락의 긴장이 천천히 풀려나갔다. "여기, 정말 아늑하다." 나직하게 뱉은 혼잣말에 상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올라가는 길, 벽면을 채운 붉은 벽돌의 거친 표면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보았다. 차갑지만 단단한 그 촉감이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방 안은 정갈했다. 과한 장식 없이 꼭 필요한 것들만 제자리에 놓인 공간. 침대에 몸을 던지자 빳빳하게 마른 시트의 서늘한 촉감이 등에 닿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창화 시내의 풍경은 지극히 평범했지만, 그 평범함이 주는 안온함이 우리를 감쌌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도 같은 리듬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특별한 계획이 없어도 좋았다. 그저 이 낯선 도시의 작은 방에 함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밀도 높은 오후였다.
오후 9시, 팔각산의 등불이 밤공기를 데우고 있을 때
저녁 무렵, 우리는 팔각산으로 향했다. 2월의 밤공기는 여전히 쌀쌀했지만, 월영 등불 축제가 뿜어내는 수만 개의 불빛이 거리의 온도를 미묘하게 높여놓은 듯했다. 밤하늘을 수놓은 등불들은 마치 지상으로 내려온 별무리 같았고, 사람들의 낮은 웅성거림은 서늘한 공기 속에 부드럽게 흩어졌다. 우리는 인파 속에서 서로의 옷소매를 살짝 쥔 채 걸었다. 누군가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다짐, 혹은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약속이 그 작은 접촉 속에 담겨 있었다.
길가에서 파는 목구아 우유를 한 잔씩 샀다. 컵을 타고 전해지는 차가운 기운에 몸이 살짝 떨렸지만, 한 모금 들이켜자 진한 달콤함이 혀끝을 부드럽게 감쌌다. 끝맛에 살짝 감도는 파파야 특유의 쌉싸름함이 매력적이었다. 너무 달기만 한 것보다 그런 작은 불균형이 있는 것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다. 우리는 등불 아래에서 서로의 얼굴에 비치는 색색의 빛을 관찰했다. 붉은색이었다가 다시 푸른색으로 변하는 서로의 표정을 보며 우리는 아이처럼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진청 호스텔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조용한 골목을 지나 발코니로 향했다. 그곳에는 과거에 물을 데우던 낡은 보일러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남아 있었다. 붉게 슨 녹과 투박한 철제 구조물 위로 작은 전구들이 띄엄띄엄 켜져 있었다. 화려한 축제의 불빛과는 대조되는, 아주 낮고 조용한 빛이었다. 우리는 그 보일러 옆에 기대어 서서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곁에 있는 사람의 온기가 외투 너머로 전해졌다.
방으로 돌아와 조명을 낮추고 나란히 누웠다. 천장의 무늬를 하나둘 세다 문득,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유명한 명소가 아니라 로비의 유리 벽돌 사이로 스며들던 오후의 빛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창한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좋았다. 그냥 좋았으니까 좋은 것이다. "내일은 조금 더 늦게 일어나도 괜찮겠지?" 내 물음에 돌아온 긍정의 대답이 밤의 정적 속에 포근하게 내려앉았다.
신발 끝이 서로 맞닿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