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의 시작은 사소한 내기였다. 누가 가장 늦게 약속 장소에 나타날 것인가. 결과는 허망할 정도로 뻔했다. 늘 지각이 일상이었던 친구가 웬일로 정시에 도착했고, 정시 도착을 자부하던 친구가 30분을 늦었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우리 모두를 태운 기차였다. 묘리로 향하는 기차 안, 창틈으로 스며든 공기는 섭씨 24도였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피부에 닿는 감촉이 딱 적당한 온도. 누군가는 구겨진 지도를 펼쳐 든 채 미간을 찌푸렸고, 누군가는 규칙적인 기차의 진동에 몸을 맡긴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결국 다 늦은 거나 마찬가지네." 누군가 툭 던진 말에 우리는 서로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며 낄낄거렸다. 목적지가 어디든, 혹은 조금 늦어지든 상관없다는 나른한 해방감이 우리 사이를 메웠다. 특별한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그저 4월이라는 계절이 주는 설렘에 몸을 실어, 어디로든 흘러가고 싶었을 뿐이다.
하얀 꽃잎의 속삭임과 정직한 한 그릇
차를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세상의 채도가 낮아지며 온통 하얗게 변하는 구간이 나타난다. 묘리의 통화 꽃이었다. 사람들은 이 풍경을 '4월의 눈'이라 불렀다. 차 문을 열자마자 차갑고 보드라운 꽃잎 하나가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아주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마치 누군가 아주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톡톡 친 것 같은 다정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홀린 듯 차를 세우고 그 하얀 길을 걸었다. 발밑에는 이미 꽃잎이 겹겹이 쌓여 푹신한 카펫처럼 느껴졌고, 코끝에는 옅은 꽃향기와 섞인 서늘한 숲의 냄새가 감돌았다. 우리는 굳이 이 풍경의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그저 눈앞이 하얗다는 것, 그리고 바람이 적당히 불어 뺨을 스치는 감촉이 시원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허기가 밀려올 때쯤, 세월의 때가 묻은 '강기구기'라는 오래된 가게에 들어섰다. 3대째 가업을 잇는다는 이곳에서 우리는 완탕과 육원을 주문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완탕의 피는 투명할 정도로 얇았고, 뜨거운 국물은 목을 타고 내려가며 온몸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달콤한 소스가 배어든 육원과 아삭하게 씹히는 죽순의 식감은 입안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친구 하나가 입가에 소스를 묻힌 채 "이거 생각보다 진짜 괜찮은데?"라고 중얼거렸다. 우리는 그 말에 동의하며 말없이 음식을 밀어 넣었다. 화려한 기교는 없었지만,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있는 정직한 맛이었다. 그 투박한 정직함이 여행자의 허기와 마음을 동시에 채워주었다.
숲의 숨결이 머무는 나무의 품으로
마침내 舞牛森度假飯店 Hotel Woodland에 도착했다. 로비의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진한 나무 향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인위적인 방향제의 향이 아니라, 오랜 시간 잘 말린 목재가 내뿜는 묵직하고 포근한 숲의 냄새였다. 체크인을 마치고 우리가 배정받은 '클래식 채하' 객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창가 쪽 툇마루 공간으로 달려갔다. 누가 먼저 저곳의 주인이 될 것인가를 두고 짧고 치열한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가위바위보라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결정했다. 승리한 친구가 툇마루에 대자로 뻗어 창밖으로 펼쳐진 평화로운 목장 풍경을 독점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 이제야 진짜 도착했구나.'
방은 생각보다 넓고 아늑했다. 발소리를 낮게 흡수하는 카펫의 질감과 매끄럽게 닦인 나무 벽면이 소란스러웠던 마음을 차분하게 고요해지혀 주었다. 우리는 각자 짐을 풀고, 호텔에서 제공한 수제 비누를 만져보았다. 손끝에 닿는 비누의 단단하고 매끄러운 촉감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오후 세 시, 기다리던 티타임 시간이 되었다. 따뜻한 목장 밀크티와 상큼한 크랜베리 주스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밀크티의 온기가 컵을 타고 손바닥으로 천천히 전해졌다. 우리는 창밖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들을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워 있는 것이 이번 여행의 유일한 목적이었다면, 우리는 이미 완벽한 목적지에 도착한 셈이었다.
저녁 무렵에는 목장을 산책하며 어린 송아지에게 우유를 주는 체험을 했다. 송아지의 젖은 코끝이 손등에 닿았을 때의 그 눅눅하고 따뜻한 감촉, 그리고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작은 숨소리가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작은 생명의 온기를 느끼며 우리는 아주 천천히 걸었다.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는 시간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방 안의 조명이 은은한 호박색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나무 결이 살아있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특별한 대화는 없었지만, 곁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깊은 안심이 되었다. 푹신한 침구 속으로 몸을 깊숙이 밀어 넣자, 적당한 나른함과 고요함이 우리를 감쌌다. 다시 이곳에 돌아와 이 정적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창밖의 초록빛 정적이 우리들의 숨소리 위로 가만히 내려앉았다.
- 4월의 묘리를 방문한다면 통화 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산길을 천천히 걸어보길 권한다.
- 舞牛森度假飯店 Hotel Woodland의 클래식 채하 객실 툇마루에서 아무 생각 없이 누워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