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마호가니 빛의 나무 책장. 손끝에 닿는 표면은 매끄러우면서도 서늘한 냉기를 머금고 있다. 천장까지 높게 뻗은 목재의 육중한 무게감이 공간을 압도하고, 그 사이를 이름 모를 책들이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코끝에는 오래된 종이의 눅눅한 단내와 은은한 나무 향이 섞여 감돈다. 로비의 에어컨 바람이 피부에 닿는 순간, 밖에서 묻혀온 8월의 끈적한 습기가 순식간에 증발하며 쾌적한 정적이 찾아온다. 불규칙하게 배열된 책등의 색깔들, 모서리가 닳아 하얗게 일어난 페이지, 누군가 읽다 만 흔적으로 살짝 접힌 귀퉁이들이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이들의 시간을 증명하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닿아있던 순간들
"이 책, 읽어봤어?"
그가 손가락으로 얇은 시집 한 권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책 표지의 질감을 가만히 살폈다.
"아니. 근데 표지가 꽤 담백하네."
"그렇네. 내용도 이 표지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으면 좋겠는데."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책장 앞에 나란히 선 채 서로의 어깨가 아주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얇은 옷감 너머로 전해진 온기가 조금 뜨거웠지만, 우리는 그저 묵묵히 책등의 제목들만 바라봤다. 묘한 긴장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그냥 아무거나 골라볼까? 굳이 다 읽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래. 그게 더 낭만적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결국 어떤 책도 집어 들지 않았다. 대신 로비의 깊은 정적을 함께 공유했다. 그 적막은 결코 불편하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 사이의 어색함을 적당한 거리로 유지해 주는 다정한 막처럼 느껴졌다.
무용한 것들이 채워준 우리 사이의 빈칸
체크아웃을 하고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가끔 그 서가의 서늘한 온도가 생각난다. 8월의 타이중은 가혹할 만큼 뜨거웠다. 평균 기온 29도, 습도 78퍼센트. 밖으로 한 걸음만 내디디면 공기가 피부에 쩍쩍 달라붙어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He Ti Jiu Dian의 객실 문을 닫는 순간, 세상은 전혀 다른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휴식 중심의 객실답게 빳빳하게 다려진 하얀 린넨 시트는 몸을 뉘었을 때 기분 좋은 서늘함을 선사했고, 로비에 들어설 때마다 느껴지던 은은한 향기는 마음의 소란을 잠재웠다. 창밖으로는 74번 고속도로의 차 소리가 낮게 깔렸지만, 그 소음은 오히려 방 안의 고요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배경음악 같았다.
다음 날 아침, 호텔 내 전통 레스토랑의 조식 뷔페에서 마주한 밀크피쉬 죽은 적당히 뜨거웠다. 숟가락으로 떴을 때 쌀알이 뭉근하게 퍼져 있었고, 짭조름하면서도 깊은 풍미가 혀끝에 천천히 남았다. 함께 곁들인 치킨 라이스는 밥알 하나하나에 진한 육수가 잘 배어 있어 입안 가득 풍요로운 맛을 냈다. 우리는 화려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죽이 따뜻하다는 것, 커피가 적당히 쓰다는 것 정도의 짧은 감상만을 주고받았다.
호텔 근처의 산책로를 잠잠히 걷던 중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산이 없어 옷이 금세 젖어버렸지만, 우리는 당황하는 대신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젖은 옷이 몸에 감기는 눅눅한 느낌조차 그 순간만큼은 싫지 않았다. 다시 He Ti Jiu Dian로 돌아와 로비의 서가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곳의 무용한 책들과 서늘한 공기, 그리고 정성스러운 아침 식사가 우리 사이의 서툰 빈칸들을 대신 채워주고 있었다는 것을.
거창한 계획도, 대단한 깨달음도 없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깨끗한 방에 누워 빗소리를 듣고, 따뜻한 죽 한 그릇에 온기를 나누며, 읽지 않을 책들 사이에서 서로를 가만히 관찰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과장할 필요 없이, 그냥 좋았다. 다시 그 습한 8월의 타이중으로 돌아가, 그 서늘한 책장 앞에 나란히 서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이 든다.
비 갠 뒤의 로비에는 투명한 정적만이 고여 있었다.
- 조식 뷔페의 밀크피쉬 죽과 치킨 라이스로 든든한 아침을 맞이할 것.
- 로비의 서가에서 아무 책이나 펼쳐 든 채 잠시 머물며 정적을 즐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