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의 거대한 서가가 준 정적. 체크인을 기다리며 마주한 벽면 가득한 책장은 단순한 인테리어가 아니었다. 코끝을 스치는 오래된 종이 냄새와 은은한 노란 조명이 공간을 감싸 안았고, 평소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던 친구들이 약 3분 동안 침묵하며 책등을 훑었다. '이렇게 조용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의 낯선 고요함이었지만, 그 정적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더 깊게 느끼며 묘한 안도감을 공유했다.
콘솔 게임기 앞의 유쾌한 소란. 호텔 내 게임룸에서 어른들이 옹기종기 모여 화면 속 세계에 몰두하는 모습은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저녁 식사비를 누가 낼 것인가를 두고 벌인 무의미한 승부였지만, 손끝에 전해지는 진동과 "이번 판 지는 사람이 쏘는 거다!"라는 가벼운 고함 소리가 여행의 긴장을 기분 좋게 풀어주었다. 비즈니스 호텔 특유의 정제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이 소란함이 오히려 우리에겐 가장 기억에 남는 웃음 포인트가 되었다.
타이중의 다정한 공기. 10월의 타이중은 셔츠 한 장만 걸쳐도 덥지 않고, 그렇다고 춥지도 않은 딱 25도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He Ti Jiu Dian 근처를 걷는 동안 피부에 닿는 바람의 감촉이 너무나 쾌적해서, 땀 한 방울 나지 않는 산책의 즐거움에 푹 빠져들었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도시의 공기는 우리를 너그럽게 품어주었다.
전통 레스토랑에서 만난 따뜻한 위로. 조식 뷔페의 전통 레스토랑에서 마주한 밀크피쉬 죽은 하얀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었다. 짭조름하면서도 담백한 풍미가 혀끝에 닿는 순간, 따뜻한 액체가 위장을 부드럽게 채우며 비로소 잠들어 있던 감각들이 깨어났다. 함께 곁들인 치킨 라이스의 고슬고슬한 식감까지 더해지니, 화려하진 않아도 마음까지 든든해지는 완벽한 아침 식사였다.
바스락거리는 하얀 시트 위로 무너진 몸. 하루 종일 추홍곡의 붉은 풍경을 걷고 돌아와 휴식풍 객실의 침대에 몸을 던졌을 때, 빳빳하고 깨끗한 시트의 촉감이 온몸을 감쌌다. 낮은 에어컨 소음이 배경음악처럼 깔린 방 안에서 친구들의 나지막한 수다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는 안도감과 함께, 이곳에 머물기로 한 결정이 이번 여행의 신의 한 수였음을 깨달은 뭉클한 순간이었다.
이 순간들이 모여 만든 무늬
돌이켜보면 하나하나 특별할 것 없는 조각들이었다.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했을지 모를 서가 앞의 침묵이나,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게임 승부 같은 것들. 하지만 그 무용한 순간들이 겹겹이 쌓이자 여행은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형태를 갖추었다. 억지로 무언가를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소음이 있는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He Ti Jiu Dian은 우리에게 거창한 영감을 주지는 않았지만, 대신 지친 마음을 가만히 내려놓을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쿠션이 되어주었다.
로비의 은은한 조명이 마지막까지 우리를 다정하게 배웅하고 있었다.
- 조식 메뉴 중 밀크피쉬 죽과 치킨 라이스는 꼭 맛보길 권한다.
- 호텔에서 가까운 추홍곡에서 가벼운 가을 산책을 즐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