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의 온기 속에 머문 말들
"내일은 정말 가기로 했던 가을 붉은 골짜기에 갈까?" 그가 컵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손가락이 컵의 요철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침대에 반쯤 누워 낮은 조도의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대답했다. "글쎄. 그냥 여기 계속 누워 있으면 안 될까." "그럴까."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타이중 시내의 불빛들이 아득한 은하수처럼 멀게 느껴졌다. "사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이번 여행의 진짜 목적이었잖아." "맞아. 그게 제일 중요하지." 서로를 보지 않고 웃었지만, 그 짧은 웃음소리가 서늘한 방 안의 공기를 아주 조금 데우는 기분이 들었다.무용한 시간들이 빚어낸 기억의 조각
체크아웃을 하고 돌아오는 길, 나는 그 투박한 컵 속에 담겼던 미지근한 차의 온도를 떠올렸다. 타이중 시내에서 차로 30분, 일부러 선택한 그 적당한 거리감이 우리에겐 절실했다. 시내의 소음이 닿지 않는 타이핑의 언덕 위, Wei Xiao De Jia ( Min Su )라는 이름의 리모델링된 별장은 우리를 조용히 품어주었다. 나무 바닥이 밟힐 때마다 나던 삐걱거리는 소리는 낯설기보다, 이곳이 누군가의 삶이 켜켜이 쌓인 공간이라는 안심을 주었다.9월의 공기는 묘한 경계에 있었다. 아주 춥지는 않지만, 피부에 닿는 바람 끝에는 가을의 서늘함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그 바람을 맞으며 시내의 아치 식당에서 푸주 국수를 먹었다. 쫄깃하게 씹히는 면발과 짭조름한 고기 고명의 맛이 혀끝에 남았고, 우리는 그 사소한 맛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세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단한 미식 평론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맛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굴었다.
잠시 들른 가을 붉은 골짜기는 도시 속에 숨겨진 낮은 분지 같았다. 지면보다 낮게 설계된 공원을 따라 내려가며 우리는 도시의 소음이 물리적으로 차단되는 경험을 했다. 초록의 풀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바스락거림, 그리고 그 옆을 걷는 서로의 일정한 발소리만 들렸다. 특별한 대화는 없었지만, 함께 걷는 리듬이 비슷해졌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Wei Xiao De Jia ( Min Su )의 주인은 과하지 않은 친절함을 가지고 있었다. 정원에서 마신 아침 공기는 냉장고에서 막 꺼낸 것처럼 청량했고,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그 서늘함이 잠들어 있던 감각들을 하나씩 깨웠다. 우리는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그저 오후 4시에 입실해, 다음 날 오전 10시 30분에 나갈 때까지 서로의 호흡 소리를 듣고, 가끔 창밖의 산세와 시티뷰를 번갈아 보았을 뿐이다.
더블룸의 침구는 적당히 빳빳했고, 몸을 뉘었을 때 느껴지는 포근함은 집에서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낯선 곳에서의 잠은 평소보다 깊고 무거웠다. 우리는 그 무거운 잠 속에서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며, 삶이 꼭 특별한 사건들로 채워질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좋은 곳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 그 투박한 세라믹 컵에 담겼던 미지근한 차처럼,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무용함이 우리를 구원했다.
다시 그 언덕으로 돌아간다면, 아마 우리는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여행의 형태가 될 것이다. 나쁘지 않은, 아니, 아주 다정한 시간이었다.
시내의 불빛이 아주 작은 소금 알갱이처럼 흩어져 있었다.
- 타이중 시내와 적당히 떨어진 타이핑 지역의 고요함을 즐겨보세요.
- 9월의 서늘한 바람이 불 때, 정원에서 아침 공기를 마시는 시간을 추천합니다.